// 바로 위에 추가를 하자!

몇주째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듯... 그래도 워낙 주위환경이 다이내믹해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화해내려면 그 정도는 무기력해져 있어야 했다....라는 변명을 해본다;

일요일 오후, 생각해 보니 음악회에 가기로 했었다. 느릿느릿 무기력해진 몸을 일으켜서 집을 나섰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차가 전혀 막히지 않아서 15분만에 엘지아트센터에 도착;; 역시 느릿느릿 움직여서 표를 찾고 주차권에 도장을 받고 프로그램을 사고 등등..... 현악사중주 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다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아무런 기대도 설레임도 들지 않았었다.

공연 시작 전 장내 방송으로 휴대폰을 꺼달라는 안내가 나왔는데 무심코 듣다가 실소를 했다. 공연 중 작은 휴대폰 진동소리와 불빛도 연주자에게 "시련과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고 주의해 달라는 내용. 엘지아트센터의 유머감각이 향상된 듯. ^^
 
에머슨 쿼텟의 악기는 지그문토비치 제작의 악기들이라고 프로그램에 나와있었다. 어렴풋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소문이 자자한 당대의 명장 지그문토비치의 악기를 쿼텟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로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유진 드러커는 1686년 스트라드도 가지고 있고 로렌스 더튼도 만테가짜의 비올라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어서 사실 당일 연주한 악기가 어느 것이 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느낌상.. 드러커와 더튼 모두 지그문토비치로 연주한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연주는 모차르트의 불협화음으로 시작되었다. 음... 이게 모차르트가 맞는가 싶은 생각이 살짝살짝 드는 연주다. 뉴요커가 연주하면 모차르트는 이렇게도 되는구나. 아니면 내가 모차르트를 너무 편향되게 듣고 있었던가...?

 

이어지는 곡은 편안한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체코인이 보는 아메리카라기 보다는 너무나 미국적인 아메리카다. 하지만 정말 맛깔나게 연주한다. 특히 비올라와 첼로의 저음부가 매력적이었다. 첼리스트 데이비드 핀켈은 음악가라기 보다는 영화에 나오는 5-60년대 미국 사업가 같은 외모로 (아마추어 첼리스트 같은 외모라는 말...) 멋진 연주를 들려 주었다. 눈이 보는 것과 귀가 듣는 것이 서로 매치되지 않아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ㅎㅎ

 

2부의 쇼스타코비치는 악장간 간격이 없이 다섯 악장이 이어서 연주되었는데 딴 생각이 들 틈이 없을 정도. 분명히 4명이 연주하는데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은 오케스트라의 느낌이었다. 더구나 쇼스타코비치의 독특한 리듬감과 멜로디를 "신나게" 살려내는데... 이것도 너무 미국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또 좋았다. 쇼스타코비치 연주에서도 비올라와 첼로는 상당히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 주었다. 두 바이올린도 때로는 파워풀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꽤 까다로와 보이는 테크닉을 소화하면서도 딱 그들의 쇼스타코비치를 들려 주었다.

 

악기소리는 바이올린들 보다는 비올라와 첼로 쪽이 더 좋았다. 드러커의 바이올린은 가끔씩 g현 하이포지션에서 버징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필립 셋처의 연주가 더 부드럽게 느껴졌고 드러커의 악기는 조금은 성마른 느낌이었다.

 

관중들의 호응에 이어진 첫 앵콜곡은 드보르작의 사이프러스를 쿼텟을 위하여 편곡한 곡이었고 두번째는 놀랍게도 베토벤 라주모프스키 3번의 피날레였다. 으윽... 이걸 앵콜로 해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더구나 노친네들이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이렇게나 파워풀하게 연주를 해주다니.... 앵콜까지 다 듣고 나니 계속 나를 괴롭히던 무기력증에서 상당히 회복된 느낌이 들었다... 진짜로.

 

연주를 보면서 에머슨 쿼텟은 매우 미국적인 (그것도 상당히 이스트코스트적인) 음악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어째 그 사람들이 연주하러 여기 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사 일로 여기 와 있고 곧 미팅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ㅠㅠ 왜 그런 느낌이 자꾸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최근에 내가 미국인 연주자들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프로그램

 

MOZART: Quartet in C Major, K 465 Dissonant 
DVORAK: String Quartet in F Major, Op. 96 (American) 
***INTERMISSION*** 
SHOSTAKOVICH: Quartet No. 9 in E-flat Major, op. 117 
 
앵콜
 
1. 드보르작 "사이프러스" 중 3번째곡 Andante con moto 
2. 베토벤 현악4중주 Op.59 No.3 중 제4악장 
Posted by 슈삐.

많이 기대했었고, 기대했던 것 만큼 재미있었던 공연이다. 클라라 하스킬이 모차르트를 가장 아름답게 연주하는 연주자라면, 레빈은 모차르트를 가장 재미있게 연주하는 연주자가 아닐까.

CD를 들고 갔었더라면 연주회가 끝나고 싸인을 받는 건데... 라는 생각도 간만에 들었다. (시간이 안맞아 연주회를 갈까 말까 계속 망설였었는데.. CD를 들고 가는 것까지 생각을 했었을리가 없긴 하다..ㅠㅠ)

특이하게도 레빈은 무대로 나오자 마자 마이크를 들었다. 오랫동안 교단에 서왔던 교수님답게 어찌 달변이던지... 사려깊은 교수님께서는 영어에 익숙치 않은 한국 관객들을 위해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알기 쉽게 자신이 오늘밤 어떤 연주를 계획하고 있는지, 그 연주가 현대의 많은 연주자들의 연주와 어떻게 다른 것이 될지 잘 설명을 해주셨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notes들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story를 들려 주는 것이라는 것 (지금도 음악 아니 모든 예술은 예술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전반부는 fake improvisation이 될 것이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가 즉흥연주를 잘 하지 못하는 누이 난넬을 위하여 작곡한 곡을 연주할 것이며, 후반부에는 real improvisation을 선보일 것이라며, 관객들이 적어내는 테마를 improvise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Art is all about communication"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여기 있는 모두가 10월31일 H.O.A.M 아트홀에서의 콘서트를 잊지못할 시간으로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그는 뒤에 놓여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돌아가 연주를 시작했다.

레빈의 포르테피아노 연주를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악기가 스타인웨이여도 그의 연주는 특징적이고 인상적이다. 다양한 장식음과 카덴차들이 그의 연주들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었는데,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기넘치는 연주자가 아닐 수 없다. 언뜻 봤을 때는 전에 왔을 때 보다 좀 더 나이들어 보였지만,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있어서인지 피아노 앞에 있는 그는 마치 모차르트의 재현인 듯 젊고 열정이 넘쳐 보였다.

첫 곡 F major 소나타의 빠른 악장에서는 정말 18세기 관객들 앞에서 연주하는 모차르트가 상상되었고... 짧은 프렐류드로 12개의 변주곡과 첫 소나타를 연결했다. 12개의 변주곡은, 그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variation에 more variation이 넣어져 연주되었는데, 변주마다 단순히 몇 개의 음들이 바뀌면서 조금씩 느낌이 달라지기도 했고, 장식음들이 첨가되면서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했다.

드디어 후반부. 악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차르트 풍의 테마를 적어 넣어 달라고 레빈이 부탁했었는데... 나와는 달리... 악보를 읽고 쓸 수 있는 분들이 많았던 듯 하다..^^; (음치인 나는 인터미션 동안 음악과 전혀 관계없는 책을 읽었...) 레빈이 연거푸 C major 테마 두 개를 뽑아 내었고, 그 다음엔 too many C major라고 살짝 투덜대면서 다른 조성의 테마들을 두 개 더 뽑았다. 아마도 b minor와 c minor (나는 속으로 "음.. 다장조가 아닌 테마들을 써낸 사람들도 있군..."이라고 생각했었다는...;;;) 뽑은 4개의 테마들을 들고 그는 이제 연주를 시작한다며 Ladies and gentlemen, Fasten your seat-belt! 하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호... 4개의 테마들이 레빈이 생각하는 모차르트 스타일의 변주들로 쭉 엮이기 시작하는데.. 정말 그것은 놀랍고 즐겁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제서야... 나도 테마를 한 번 써내어 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ㅠㅠ 어떻게 저렇게 아이디어가 풍부할까 싶은 변주들이 이어졌고, 그 중 그다지 모차르트스럽지 않은 테마들마저 그의 변주로 모차르트식의 음악으로 탈바꿈하는 모습도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그는 첫 주제로 다시 돌아가 4개의 혼합 테마에 의한 모차르트 즉흥변주곡을 끝마치고는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갔다 나와서는, 마치 지금 빨리 안가면 열차를 놓칠 사람처럼 이제 우리는 b flat major로 가야한다면서 피아노에 앉았다. 모차르트가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는 두 개의 소나타의 연주와 K.333도 역시 그의 재기발랄한 음악으로 가득 메워졌다.

레빈이라는 천재가 보여 준 유쾌한 음악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특별한 연주회. 그는 확실히 communication이 무엇인지를 아는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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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l Mozart Program 

-소나타 F 장조 K. 533/494
-프렐류드(F 장조에서 C 장조로 전조, K. deest + 624 (626a) Anh. I, (K6 Anh. C 15.11)
-‘아, 어머님께 말씀 드리죠’ 주제에 의한 변주곡, K. 265

Intermission 

-모차르트 테마에 의한 즉흥연주 (10-15분)
-알레그로, 소나타 B-flat 장조, K. 400 * 
-알레그로, 소나타 in G 단조, K. 312 *
-소나타 B-flat 장조 K. 333 

* 는 본래 미완성 곡이며, 이번 공연에서 로버트 레빈이 직접 완성한 버전으로 연주합니다. 


레빈이 관객들이 적어 낸 테마들이 있는 통에서 테마를 뽑으며 읽어 보고 있는 장면
(출처: 호암아트홀. 조선일보)

Posted by 슈삐.

251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작년엔 250년이라고 요란했었지요... 늘 변함없는 그의 음악에 감사를 보내며~~

Good Morning~!
 
Picture of Wolfgang Amadeus <small>(Amadé)</small> Mozart.
 
 
Picture of Wolfgang Amadeus <small>(Amadé)</small> Mozart.
 

사진출처: http://www.classical-composers.org/comp/mozartwa
그리고, http://shop.berliner-philharmoniker.de/index.php?cat=c14_Plakate-und-Postkarten.html&page=2

Posted by 슈삐.

연극 Amadeu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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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madeus, 1984



그릇된 해석들

아마데우스는 지난 230년 동안 계속되어온 모차르트에 대한 환상을 이용하려고 했던 최근의 몇 가지 시도들 중 하나이다. 최근 많이 읽혀지는 두 권의 책들도 역시 모차르트의 일대기와 정신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볼프강 힐데샤이머 (Wolfgang Hildesheimer)의 '모차르트'와 프란시스 카 (Francis Carr)의 '모차르트와 콘스탄테'가 그것이다. 힐데샤이머는 서신들을 자세히 독해하여 많은 통찰력있는 견해를 제공하고는 있으나, 모차르트의 사랑과 삶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감정적인 분리에 대한 추측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 그는 모차르트의 표현이 인위적이고 무감각하다고 보았고 주어진 상황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방식으로 모차르트를 왜곡되게 평가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오래된 픽션 중 몇몇을 사용하고 그 자신이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마데우스처럼, 그의 모차르트는 환상적인 캐릭터이고 작품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더불어 그릇된 해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다른 음악애호가이며 전기작가인 프란시스 카도 역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는 인상을 준다. 카는 독살설을 다시 제기하는데, 그는 살리에리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프란츠 호프데멜(Franz Hofdemel)의 아내이고 그의 피아노 학생 중 하나였던 막달레나와 가졌던 관계 (카에 의하여 꾸며내어진) 때문에 호프데멜을 의심한다. 호프데멜은 모차르트의 사망 며칠 후에그의 아내를 상해하고 본인은 자살했다. 호프데멜의 슬픈 운명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모차르트와의 또 다른 연관관계는 그가 프리메이슨 형제였고 작곡가에게 돈을 빌려줬었다는 것 밖엔 없다. 반면에, 모차르트의 죽음과 호프데멜의 자살이 같은 시간 대와 공간에 있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다. 카의 책은 서류들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이는 타블로이드 (선정적인)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힐데샤이머와 카의 책들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의심할 수 없는 환상으로부터 성공을 이루어 냈다. 모차르트의 이름이 없었다면, 우리 자신의 문화가 만들어 낸 이런 인위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해석하기 위하여 편지, 회상, 그리고 다른 직접적인 자료들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자료들을 쉽게 구하여 질 수 있으나, 편지나 회상의 작성자들 그리고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각각의 의도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단지 사실들"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신화가 번성하는 것은 바로 서류 자체들과 그것들에 대한 해석에서 부터인 것이다.

왜 모차르트는 이토록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가? 아마 그것은 그 음악 뒤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영원히 잘못된 시도들로부터 나오게 된 것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종종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예를 들어, 교향곡 40번 g단조 K.550에 대한 비평은 찬사로 일관되어 있지만, 그 성격은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그 곡이 엄격한 의미에서 고전파 양식이고 그리스식의 "가벼움과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은 그 곡이"실내악의 숙명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젠스 피터 랄센(Jens Peter Larsen)은 그 곡은 사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믿었다. 로빈스 랜던(Robbins Landon)은 그 곡이 모차르트의 조울증적 경향의 악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한 반면에, 잭 웨스트럽(Jack Westrup)은 오페라 부파의 정신을 그 곡에서 발견했다. 아마도 어떠한 교향적 캐논 작품도 학식있는 비평가들로 부터 이렇게 다양한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반응이야 말로 이 사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설명해 주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이 사람을 설명하는 전기들이 그의 음악에 대한 반응들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역사 기록을 올바로 세우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샤퍼와 포먼의 살리에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옳다: 모차르트라는 천재는 설명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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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ter Brown 은 인디애나대 음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요세프 하이든의 건반음악: 원전과 스타일" 그리고 "하이든 '창조'의 연주"의 저자이다. 브라운판의 "창조"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에 의하여 레코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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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

연극과 영화 둘 다에서의 중심적인 문제는 모차르트의 행동인데, 그가 귀족저택의 응접실에서 콘스탄체와 시시덕거리는 것,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 과도하게 술을 마시고, 황제와 대주교에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 살리에리를 흉내내며 놀리는 것, 잘난 척을 하고, 계속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것 등이다. 만일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황제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추방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민중의"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격식이 느슨해 졌기는 하지만, 요세프2세에게 그가 말했던 것 처럼 "바보같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랬다면) 결과적으로 빈 오페라의 어떤 작품도 의뢰되거나 작곡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어떤 작품도 공연될 공간이 주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모차르트는 황제나 그의 측근들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대접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주 장면은 아마데우스에서 부주제로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마지막 1-2년간 음주량이 늘긴 했었지만, 사실 그가 과도하게 음주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콘스탄체가 바덴에 있었던 1791년 여름에, "그는 쉬카네더 (Schikaneder)와 함께 아침 내내 샴페인을 마시곤 했고 밤새도록 펀치를 마셨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그를 직접적으로 알 지 못했던 이그나츠 페르디난드 칼 아놀드(Ignaz Ernst Ferdinand Karl Arnold)로부터 온 것이다. 술마시기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은 반면,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위대한 음악이 알콜의 영향 하에서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토록 일관성있게 많은 작품들에서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모차르트의 혼외관계 문제도 제기한다. 그 장면은 후궁으로의 탈출의 초연 후에 나온다.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의 약혼녀로 황제에게 소개된다. 그 때, 프리마돈나이며 사실 살리에리의 연인인 카발리에리 (Cavalierri)는 모차르트에게 한 방 날린다. 살리에리는 숨을 죽이며 "모차르트가 그녀를 가졌군."이라고 답한다. 콘스탄체를 제외한 모차르트의 관계에 대하여는 단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몇몇 전기작가들은 모차르트가 거의 모든 그의 건반악기 제자들, 프리마돈나들 그리고 그가 일련의 저급한 편지들을 보냈었던 사촌 "Bäsle"(역주: 사촌동생을 뜻하는 슈바벤 지방 애칭)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모차르트가 연애에 빠져 있었는지, 모든 여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었는지 아닌지는 어느 한 가지 방향으로  증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했다면, 모차르트와 관계한 여인의 목록은 돈지오반니의 목록에 비견될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고 제한적인 견해를 보여 주는 두 장의 편지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첫번째는 보헤미아 작곡가인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ph Mysliwecek)의 매독에 관한 것인데, 그의 코에는 궤양이 생겨서 거의 없어질 것 같은 지경이었다. 모차르트는 직접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런 변형이 생긴 원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불쌍한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단어인 애인(maitresse)은 우리의 혀 위에서는 (wh--e in our tongue) 정말 지나치게 매력적이군요. 그러나 저는 브루네티(Brunetti)도 미슬리베체크(Mysliwechek)도 아닙니다. 저는 모차르트,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입니다."

1781년 12월에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저는 끝맺기 전에 제가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들을 말씀 드려야만 합니다. 자연의 음성은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만큼, 그리고 아마 많은 크고 힘쎈 시골뜨기 친구들에게 보다도 더 크게 들립니다. 저는 단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요즈음 하는 것처럼은 살 수가 없을 뿐입니다. 첫째로, 저는 그러기엔 너무나 종교적이고, 둘째, 저의 이웃을 너무도 사랑하며 순진한 소녀를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째로, 저는 병에 걸리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구역질 나며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그런 창녀들과 놀아 나는 바보짓을 하기에는 건강을 너무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그런 척하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도 확실히 있는데, 그는 파리여행 중이나 그 후에 그리고 1777-78년에도 가끔 그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슬리베체크와의 만남은 방탕한 생활의 위험성에 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슴에 틀림이 없고, 특히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인정되지 못한, 이해되지 않은

몇몇 사후의 조사 (또는 검시결과)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몇 년간의 생활방식이 그가 사망을 앞당겼다고 생각되며 - 비록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이러한 결론은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인용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독살설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의학적으로 그리고 단순한 관찰로서 모차르트가 최후에 앓았던 병을 진단하려는 시도들에서는 독이 아니라 티푸스에서 류마티즘 열병에 이르는 다양한 원인들을 지목했다. 피터 데이비스 박사 (Dr. Peter J. Davies)가 했던, 가장 철저했던 조사에서는 모차르트가 11월 18일에 있었던 프리메이슨 지부 집회에서 연쇄상 구균에 감염 (streptococcal infection)되어 발생한 알레르기성 자반증(Schonlein-Henoch syndrome)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후의 진단이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살설이 없었다면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이토록 의견이 분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병명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 성년의 모차르트를 작곡하게 했는가에 관한 데이비스 박사의 결론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는 어떤 시기에는 너무나 많은 작곡을 했으며, 다른 시기에는 거의 하지 않았는가? 데이비스 박사는 모차르트가, 정신병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기분이 상승했다가 침체하곤 하는 정서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는 "예술가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놀랍도록 폭발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극단적인 예이다."라고 지적한다. 17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비스 박사는 다섯 번의 그 같은 폭발을 찾아 낸다: (1) 만하임, 1777-1778년; (2) 뮌헨, 1780-81년; (3) 빈, 1786년 전반; (4) 빈, 1788년 여름; (5) 빈, 1791년 1분기. 예를 들어, 데이비스가 말한 세번째 폭발에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극장지배인,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K.488과 491, 피아노 사중주 K.493, 혼협주곡 K.495,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작품들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생산성의 시기들 (즉, 작품이 완성된 시기)만 보고 내부적인 준비작업의 시기들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가로 같은 작품의 초연 시의 흥분한 모차르트는, 데이비스에 따르면, 궤도를 좀 벗어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또한 "존경받는 사랑의 객체로부터의 정기적인 사랑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나르시즘적인 의존성도 찾아냈다. 이런 심리적인 요소와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일반적으로 직면했을 불안정함의 결합을 모차르트는 때때로 잘 극복해 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진가가 인정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해되지도 못하며, 재정적으로 힘들어 동전 몇 푼만 남은 가난한 천재로 19세기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서, 그는 1781년 이후 내내 빈 중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실, 모차르트는 자주 거주지를 바꾸었고 그의 수입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음악가로는 특이하게 높았으며, 몇 년간은 전 빈 시민들 중 상위 10%에 속했었다. 또한, 모차르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그가 그의 프리메이슨 형제인 미카엘 펀치버그(Michael Puchberg)에게 1788년에 1791년에 돈을 빌리려는 목적으로 쓴 일련의 편지로 부터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1789년 7월12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친애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가장 존경하는 B.O. 에게

위대한 신이시여! 저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적이라고 지금 저의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군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형제인 당신이 저를 버린다면, 불행하고 결백한 저 자신과 불쌍한 병든 제 아내와 아이는 모두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지난번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제 사정을 터놓고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지요 - 사실 지금도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네요. 그래서 간신히 글로 쓰고 있을 뿐이고 쓰면서도 떨고 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이 저를, 제 상황을 아시고 있고, 저의 불행과 최악의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저의 결백함을 믿고 계시다는 것을 제가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감히 편지를 써서도 안되지요. 자비로운 신이시여! 저는 당신께 감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애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빚을 갚는 것 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다른 자료들은 없지만 이러한 편지들로부터, 모차르트가 빈에서 환영받지 못했었다고 결론 지어진 것이다.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의 재정적인 상황을 악화시켰다. 모차르트는 5군데에서 수입을 얻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공공 또는 사적인 연주, 정기공연, 교습, 수수료, 그리고 음악의 출판.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경제사정이나 관련된 요소들에 의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80년대 종반에 오스트리아는 터키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고 많은 모차르트의 후원자들은 군복무를 하거나 빈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황제도 1788년에 전쟁터로 나갔다. 콘스탄체는 병들어 바덴으로 요양을 떠나야만 했다. 한 때는 그녀의 발목 궤양이 매우 심해졌었다. 온천욕을 통한 치료는 부유층들만이 사용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슴에 틀림없다. 1780년대 후반 동안 모차르트는 여러가지 활동으로 수입을 벌기보다는 작곡활동을 함으로써 수입을 일정하게 가져 가려고 노력을 했었다. 일반적인 경제상황 뿐 아니라 그들 가족의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 가족은 예전 습관대로 생활을 유지하였고 그것이 현금상태에 문제를 야기시켰다. 상황은 그들이 1780년대 초반의 6-7년간 높은 수입을 벌어들였을 때 저축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리고 1791년에 모차르트가 칼 리흐노프스키 왕자 (Prince Karl Lichnowsky)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하여 상당한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수입은 하이든이 1790년대에 벌어들인 상당한 수입을 능가하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모차르트 학자인 크레머 (Uwe Kramer)는 1780년대 초 높은 수입과 비용의 불균형이 있었을 텐데 모차르트의 현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머는 많은 현금이 당구나 카드게임을 하여 도박자금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이론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에서 부터 이런 이론이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다는 수용적인 의견까지 혼합된 반응이 있었다. 증명이 될 수 있건 없건, 모차르트의 생활 습관에 대한 몇몇 증언은 도박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피터 데이비스(Peter J. Davies)는 모차르트의 성격적인 특징이 그의 환경적인 요인과 결합되어 그가 그런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다고 빋는다.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과 매장 장면을 상상과 믿을 만하지 못한 전통을 결합하여 보여준다. 상상력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살리에리가 1791년 10월 13일 마술피리 공연에 참석했던 것이 12월 5일 모차르트의 죽음과 시간적으로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샤퍼의 버전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짧은 마지막 투병기간에 레퀴엠을 작곡하는 것을 돕는다. 사실, 모차르트의 미망인은 적어도 세명의 작곡가들에게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을 돕도록 부탁했었고 마침내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조수로 일하게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단지 몇 시간이 아니라 3주 동안이나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정성껏 돌본 것은 콘스탄체와 그녀의 가족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누이는 이 점을 전혀 인정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매장은 고트프리트 반 스비에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그는 요세프식의 매장 지침을 따랐으며 망자의 재정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데우스는 매장에 대하여는 꽤 정확한 그림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사망자를 자루에 넣어 공동묘지에 던져넣는 것은 극단적으로 모욕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1791년에는 빈 인구의 약 85%가 이런 방식으로 매장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던 매장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범이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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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저를 사랑합니다"

만약 레오폴드가 볼프강의 세계에서 "하느님 다음"이었다면,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같은 별자리의 어디 쯤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아마데우스에서 잘 보여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고 강화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었다. 이런 점에서, 강박적 외설어증, 분변기호증, 그리고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에서 음악수업과 리셉션 직전 장면에 성적인 등장 부분을 넣는 등,  그녀를 볼프강의 유치한 말장난을 같이하는 "머리가 빈"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샤퍼와 포먼의 목적에 맞게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져 있다. 그는 대주교를 알현하는 것을 끝낼 때까지는 콘스탄체와 같이 까불고 놀고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살리에리가 지켜보고 있는 중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영화와는 다른 순서로 일이 벌어졌음을 설명한다: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제가 대주교 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을 때 받은 부드러운 배려와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콘스탄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은 아마도 레오폴드와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넬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다. 미망인으로서의 콘스탄체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상당한 정도로 음악적인, 그리고 사업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슴에 틀림없다. 그녀는 죽은 남편과 그녀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페미니스트 시대 이전의 문헌에서는 그녀가 남편의 천재성 덕에 부를 누리지도 못했고 그 천재를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쓰여져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볼프강이 누구와 결혼을 했었어도 이런 비난은 퍼부어졌을 것이다. 아서 슈리그 (Arthur Schurig)는 그녀에 관한 유일한 책에서 그녀가 "인색하고, 속이 좁으며, 허영심이 많고, 탐욕스러우며, 미신적이고 수다럽다"고 말했다. 모차르트 가족의 서신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모든 형용사들이 그녀의 시댁식구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편견이 들어 있을 지라도, 콘스탄체를 가장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볼프강 그 자신의 설명이다. 그는 결혼 전에 그녀에 대하여 레오폴드를 설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자꾸 말씀을 드려서 귀찮으시겠지만 제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아버지께서 콘스탄체의 성격을 더 잘 아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라고는 작고 검은 두 눈과 귀여운 모습 뿐이지요. 그녀는 위트가 있지도 않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상식이 있어요. 그녀가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반대로, 그녀의 어머니가 적으나마나 있는 것들을 다른 두 자식들에게 해주었고 콘스탄체에게는 해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소박하게 옷을 입는데에 익숙해져 있어요. 사실 그녀는 깨끗하고 말쑥하게 옷을 입고 싶어하지만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아요. 보통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그녀는 스스로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머리도 매일 스스로 하지요. 더구나 그녀는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온 마음을 다해 저를 사랑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보다 더 나은 아내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

또한 샤퍼와 포먼은 콘스탄체가 장기 요양을 위하여 바덴에 머무르는 동안 모차르트에게 충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른 곳에서도 그녀가 그 당시에 역시 바덴에 있었던, 모차르트의 제자이며 카피스트라고 알려진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몇몇 작가들은 모차르트 사후에 그녀의 건강이 돌아와 이후 쭉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후 다시는 임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791년 7월 26일에 태어난, 그들의 아들, 프란츠 자버 볼프강은 쥐스마이어의 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었다. 이 가설은 프란츠 자버 볼프강이 그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가장 독특한 유전적인 특징 - 기형적인 왼쪽 귀 -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국, 콘스탄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다. 비난은 주로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나 남성적인 편견을 가진 음악학자 그룹으로부터 온다. 당연하게도, 콘스탄체가 가족 간의 편지를 조작했다는 점은 학자들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동기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은 어떤 사람의 일대기에 대하여 더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이전 시대에 맞는 견해라기 보다는 오히려 20세기적인 관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마 모차르트의 일생에서 콘스탄체는 그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 월버거 페틀과 가장 잘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능력이나 성향의 양면에서, 그녀는 가장 확실한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두 여인들은 상황에 맞게 행동했으나 눈에 띄지 않았었다.

평범한 기질, 시시한 농담들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묘사는 바로 볼프강 자신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형상화했을까?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을 연구하는데에 있어서 문제점은 개인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에 반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일기, 광범위한 편지, 쪽지, 언론에서의 리뷰, 회상, 음악 목록와 압보의 서명 등을 포함하여 자료가 과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알란 타이슨(Alan Tyson)은 그의 통찰력있는 글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많은 자료들이 음악천재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의 전기가 그의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가? 또 음악가의 인간됨과 그의 예술성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샤퍼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샤퍼의 볼프강은, 살리에리의 말을 빌면, "낄낄 웃어 대는 음탕한 놈"이다. 그리고 샤퍼의 살리에리가 "기적같은" 천재과 "숭고한" 음악에 관하여 번민할 때, 음악가와 그의 음악 간의 괴리는 깊어 진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암시되어진 중심적인 질문은, 모차르트의 성격과 그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역시 18세기가 아닌 19세기에나 나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작곡가로서의 조건은 천재가 되어야 하는 것도, 독창적인 예술적 견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재능의 문제이며 (음악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당시에는) 표현의 종류에 따라 디자인되어지고 사용되어 지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사전이 존재했다. 작곡가는 이들 중에서 골라서 청중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생산했다. 모차르트는 새로운 깊이있는 표현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런 음악적 어휘들을 기술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활동했었던 것은 18세기 종반에 주로 유행하던 형식의 범위 내에서였다. 그러므로, 그 사람과 그의 음악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식의 여류작가인 캐롤린 피츨러 (Karoline Pichl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내가 잘 아는데, 개인적인 교류에서 범상치 않은 지적능력을 보여 준 적이 전혀 없고 지적인 문화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어떤 학식이나 고급스러운 흥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기질적으로 좀 평범하고, 시시한 농담들을 하고, 모차르트의 경우엔, 생활에 책임감도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깊이가, 환상의 세계가, 화음이, 멜로디가 그리고 감정이 이 가망없는 외양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는 악보에 고친 흔적이 없는 모차르트의 자필악보를 보자, "기적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묘사도 역시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비범한 속도로 곡을 써나가는 재능이 있었지만, 잘못 시작된 부분과 1-2년에 걸쳐서 작곡이 진행 중이었던 곡들이 꽤 많이 있었다. 몇몇의 작곡 스케치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런 스케치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들 보다 원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이든에게 헌정되어진 6개의 사중주에 관하여, 모차르트는 출판된 악보에 부친 편지에서, "사실 이 곡들은 길고 고생스러웠던 작업의 결과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샤퍼의 볼프강이 시카네더 (Schikaneder)에게 마술피리가 그의 "국수 (역주: 머리)"에 들어 있고 단지 적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절반도 진실이 아니다. 확실히, 곡의 개념과 작곡의 상당부분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표들을 종이에 적는 행동은 분명히 변화를 야기한다. 오페라의 경우에는, 리허설이 시작되고 나면, 드라마와 배역들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수정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샤퍼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준 18세가 오페라에 대한 생각은 몇몇의 경우에서는 정확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페라를 만드는 것은 주제의 선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고용되어 가사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작곡가가 선임되어 이미 선정된 가수들에 맞게 아리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오페라를 궁정에서 연주하는 것은 정확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오페라의 감독인 프란츠 자버 오르시니-로젠버그 (Franz Xaver Orsini-Rosenberg)는, 모차르트가 주제넘게도 이미 무대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대본 - 이 경우에는 피가로 - 을 선택한 것을 놀라워 하는데 이는 정상적인 관례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터키식이고 하렘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특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배경은 특이한 것이 아니었고, 사실 모차르트는 이전에도 자이데(Zaide)로 알려진 작품에서 비슷한 장소를 선정하여 작업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는 오페라 부파라는 장르를 오페라 세리아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치 오페라 부파가 요세프 2세와 빈 사람들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었다. 이것도 역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오페라 부파는 비인의 극장들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었다. 그가 "헤라클레스" (오페라 세리아에서 등장인물의 전형)의 엄격함을 "이발사" (즉, 피가로)의 코믹한 가벼움에 비교할 때, 그는 "이발사"가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파이지엘로(Paisiello)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성공한 이후로 이미 빈의 청중들에게 인지되어 있는 사실이었는데, 피가로의 결혼은 그 속편이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1780년대에 죽은 장르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하자면, 그것은 "대리석 똥"이었다.

오페라 세리아에 관한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장르인 오페라 부파의 첫번째 독일인 대가로서 모차르트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려는 독일의 음악학자들에 쓸데없는 시도에 의하여 생겨났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역시 오페라 세리아 였다. 티토왕의 자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작곡가들인 마이어,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그리고 베르디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장르의 후대 작곡가들의 대중적인 인기가 증명하듯이 오페라 세리아는 19세기까지 계속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황제에게 피가로의 위대한 피날레에 대하여, 길이와, 레시타티브가 없는 점, 이중창에서 전체 배역으로 확장되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인 것처럼 설명한다. 사실, 이것은 작사가인 로렌조 다 폰테 (Lorenzo da Ponte)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다 폰테는 청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렇게 쓴 것이며 이런 설정의 드라마틱한 생동감과는 관계없이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었다. 심지어 피가로에 대한 관객의 반응도 영화의 의도를 위하여 바뀌어 졌는데, 아마데우스에서는 이것을 실패로 그렸다. 사실은, 황제는 이미 길어진 오페라의 공연이 결말없이 계속 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앙콜을 금지시켜야만 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페라 공연이 진행되는 방법 자체에 대하여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둘 다 오늘날 청중들이 익숙해져 있는 방법으로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것은 18세기의 사실에는 맞지 않는다. 지휘의 책임은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고 있는 악장과, 성악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며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건반악기 연주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오페라의 첫 몇 번 정도의 공연에는 작곡가가 하프시코드나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가수들을 향해 약간씩 제스쳐를 써가면서 지시를 하기도 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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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양면적인 관계

대조적으로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 살리에리, 볼프강, 그리고 콘스탄체와 함께 - 샤퍼의 4명의 주요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기사장으로 비유된 것은 이름의 표면적인 의미에 근거한 것이고,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돈지오반니에서의 등장인물과는 큰 상관은 없다. 레오폴드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했었지만, 참견꾼, 가혹한 심판관이었다. 샤퍼는 레오폴드가 비엔나에 예상치 않은 방문을 하는 것으로 극에 등장 시키는데 이는 그가 콘스탄체를 처음 만났던 실제 상황과는 다르다. 그 커플은 사실 1783년 말에 잘츠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방문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아마데우스에서는 1783년 잘츠부르크 방문에서의 분위기를 1785년에 있었던 레오폴드의 비엔나 방문과 1780년대 후반의 모차르트의 재정적인 어려움과 연결시켰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아파트에 들어오는 장면과, 그가 전날 밤에 먹고 마셨던 와인잔과 접시들이 널려 있는 것과 콘스탄체는 아직 잠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문하는 듯한 질문들- 하녀는 없느냐, 경제적인 상황은 어떠하니, 네가 빚이 있다고 하더라, 학생은 받고 있느냐, 그리고 콘스탄체에게는, 임신을 하고 있느냐 - 을 던지는 것은, 18세기 비엔나의 성공적인 프리랜서 음악가의 생활에 대한 것이 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만약 그 질문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20세기의 남성, 여성들에게 레오폴드에 대하여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그의 성격은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폰 발트슈타텐 남작 (Baroness von Waldstadten)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하고 있슴은 확실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철학자들은 말이 없고 잘 웃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세상을 향해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나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나는 틀림없이 철학자로 보일 것이다."

(영화와는) 반대로, 레오폴드가 1785년 2월11일에서 4월25일까지 아들을 실제로 방문했을 때, 볼프강은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했다. 레오폴드가 방문했던 기간에, 모차르트는 6회의 예약제연주회를 가졌었고 (2월 11, 18, 25일, 3월 4, 11, 18일), 요세프 하이든은 2월 12일에 볼프강이 그에게 헌정한 6개의 사중주곡의 첫 3곡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여 레오폴드에게 그의 아들이 그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 최고의 작곡가라고 이야기 하였다. 2월 13일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K.456을 부르크극장 (Burgtheater)에서 연주하였고, 2월 15일에는 다른 협주곡 K.466을 같은 장소에서 연주했으며, 21일에는 지키 (Zichy)백작을 위하여 연주하였다. 3월 10일에는 부르크극장에서 다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13일과 15일에는 음악가협회(Tonkünstler Societät)가 모차르트의 오라토리오 '다윗의 회개 (Davide Penitente)'를 부르크극장에서 공연하였다. 3월 20일에 모차르트는 아마 안나 스토라체의 연주회에 갔었을 것이며, 4월 2일에는 6개의 "하이든" 사중주 모두를 베츨라 폰 플랑켄스턴의 저택에서 연주했다. 4월 24일에는 프리메이슨 칸타타 K.471이 "Zur Eintracht"의 별장에서 울려퍼졌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는 흥분되는 것들이었다. 1760년대와 70년대 그 가족들의 여행도 이러한 활동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모차르트가 이 시기에 벌어들인 돈은 레오폴드의 연봉의 몇 배나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반응은 노련한 음악가답게 별로 특색이 없었다. "우리는 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9시 전에 일어나지 않는단다. 2시나 2시 반 경에 점심을 먹지. 날씨는 좋지 않아. 매일 같이 연주회가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곡을 하면서 보낸단다. 나는 여기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좀 든단다. 연주회들이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런 야단법석을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내가 도착한 이후로, 네 동생의 포르테피아노는 열두 번도 더 극장이나 다른 사람의 집으로 옮겨졌었단다. 피아노 밑에는 큰 페달이 있는데 2피트나 되고 엄청나게 무겁단다. 그것이 멜그루브로 매주 금요일마다 옮겨졌다가 또 지키 (Zichy) 백작댁으로, 카우니츠 (Kaunitz) 왕자댁으로 옮겨지곤 한단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에서 떠난 이후로, 그는 그의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마데우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양면적인 것이었다. 볼프강의 부모에 대한 시각은 3가지의, 매우 다르고 상충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신이 내린 기적"으로 여겼었고 아들의 음악교육 (바이올린, 건반, 작곡)을 비롯한 교육에 헌신했었다. 레오폴드는 그에게 단지 아버지가 되어준 것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를 교육시켰다. 이러한 어린 시절은 볼프강이 아버지를 가장 좋아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볼프강은 유순한 아이였고 레오폴드는 항상 그를 콘트롤하면서 파리, 런던, 비엔나에 두번, 이탈리아에 세번 여행을 가도록 했었다.

볼프강이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방향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레오폴드는 그의 거주지를 대주교가 제한했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들과의 긴 여행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 없었고, 볼프강은 이제 더 이상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으며 자기 고집이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만약 레오폴드가 같이 있지 않았다면, 볼프강은 아마 그렇게 잘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오폴드는 좀처럼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볼프강이 파리와 다른 지역에 있는 동안, 첩자가 그의 아들의 활동을 염탐하여 레오폴드에게 보고 했었다. 파리 여행의 목적은 볼프강의 직업을 찾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행은 볼프강이 여자에 약하다는 점과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최고의 충격은 그의 어머니의 사망이었는데, 그 때 이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레오폴드는 볼프강이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부모님과 잘츠부르크로부터의 자유를 맛 본 이후로, 식구들의 영역을 떠나는 것이 볼프강의 가장 강한 소망이 되었다. 볼프강은 문자 그대로 대주교의 관할에서 문 밖으로 쫓겨남으로서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레오폴드를 더욱 고립시켰는데, 그는 볼프강이 독립적으로 스스로 자기관리를 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볼프강이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를 바랬었다. 레오폴드는 비엔나의 대중들이 궁극적으로 볼프강의 음악을 싫증낼 것으로 생각했고, 볼프강은 그 자신을 관리할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볼프강이 궁정의 직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자기 파멸의 징조로 여겼다.

더구나, 레오폴드 보다 더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부터 몰아 내었던 것은 대주교와 지역의 음악가 들이었다. 또한 이 도시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은 작곡가를 위한 공간도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볼프강이 태어난 도시에 남아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던 신동이라는 굴레가 그곳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작은 기적"으로 생각했고 1770년대 중반까지도 젊고 재능있는 음악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음에도 불구하고, 볼프강은 비엔나에서 자립했고,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에 완전한 독립을 향한 그의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

볼프강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율하는 것에는 확실히 레오폴드 만큼 유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관리스타일은 찌꺼기를 남겨서 볼프강이 일종의 직위를 얻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1769년에 이미 요한 아돌프 하쎄는 반기을 들었다. "그 모차르트 선생은 아주 예의바르고 세련된 분입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매우 잘 교육받았지요. 아들은 더없이 잘생기고, 생기있고 우아하며 예의가 바릅니다. 그리고 그를 알면 알 수록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나는 만약 그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제대로 발전을 한다면, 그는 신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마 너무 그를 응석받이로 키우거나, 과도한 칭찬으로 그를 망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제가 우려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1771년에 다시, "젊은 모차르트는 그의 나이에 비하여 확실히 훌륭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끝없이 사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같은 불평을 여기에서도 늘어 놓기 때문이지요. 그는 그의 아들을 좀 심하게 우상화하고, 그래서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들을 망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감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아버지의 알랑거림에도 그가 망쳐지지 않고 정직한 친구로 자라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의 12월에,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밀라노 총독인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에게 다음과 같은 우려를 이야기 하고 있다. "네가 나에게 젊은 잘츠부르크인을 써도 좋은지 묻는구나. 나는 네가 작곡가를 원하는 것인지 쓸모없는 사람들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만약 그 일이 너에게 기쁨을 준다면, 나는 너를 방해할 생각은 없단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네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직위를 주고 채용해서 부담이 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어서란다. 만약 그들이 채용된다면, 그들이 거지들처럼 세상을 돌아다녀 궁정음악가들의 품위를 더 떨어 뜨리게 만들 것이란다."

모차르트라는 이름은 볼프강이 1777년에서 1778년에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이미 그 골치아픈 명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기사장과, 레퀴엠을 주문한 사신의 역할로서의 야누스의 얼굴을 한 검은 카니발 가면을 레오폴드가 연기하도록 한 것은 샤퍼의 빛나는 연극적인 아이디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이 작곡을 그의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그 곡은 발세그-스투파흐 (Walsegg-Stuppach) 백작이 그의 아내를 위하여 주문한 것이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작곡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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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강박적인 질투심

비록 제목은 아마데우스이지만, 샤퍼의 작품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1825)이다. 살리에리는 1774년에서 1824년까지 비엔나의 궁정음악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말년에 그는 노인성 치매로 고통을 겪었다. 1824년 경에 비엔나에 떠돌던 루머 중에서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 었다. 이 이야기는 베토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귀에도 전해졌다. 1825년 살리에리의 비서 두 명은 그들의 업무 중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을 했고, 모차르트 담당의의 친구는 볼프강이 당시 비엔나에 퍼져있던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부터 샤퍼는 아마데우스의 중심 캐릭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인적인 질투에 사로잡힌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는 루머의 확산에 부채질을 했는데, 그녀는 살리에리가 그녀의 남편을 모함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설사 뜨거운 적대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계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보존하려고 했었을 뿐이 었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한 설명일 것이다. 만약 궁정음악계의 힘이 매우 강력하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성공을 방해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나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는 작곡되지도 궁정극장에서 공연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나쁜 관계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면, 살리에리는 확실히 1786년 2월에 쉔부른 궁전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홍보 전단을 같이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1787년 12월 궁정 실내작곡가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망 즈음에는 성 스테판 성당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었다. 살리에리는 심지어 1791년 10월 13일의 마술피리 공연에도 참석했었고 모차르트의 사망 전일에 그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언에 의하면 12월6일의 장례식에도 조문을 했었다.

만약 살리에리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강박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질투심은 여러가지로 관찰되었을 것이다. 궁정작곡가로서 제국의 음악감독으로, 그는 많은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이탈리아 교재들로 그와 공부했고,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특별한 재능을 일찌기 발겼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페라, 노래, 4중주, 교향곡, 무엇이던지 작곡을 한다." 1816년 6월에 존경받는 카펠마이스터는 황제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장에 슈베르트에 대한 개인적이고 정직한 찬사를 남겼다.

모든 제자들이 주위에 모여 그의 희년을 축하하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해주는 것을 보며, 요즘의 작곡가들을 얽매는 경향이 있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 위대한 독일 음악가 (베토벤)의 덕택으로 우리가 얻게된, 모든 기발한 것들 -로 부터 벗어나 자연의 단순한 표현으로 되어 있는 제자의 작품들을 듣는 것은 어느 음악가에게나 즐겁고 설레이는 일일 것이다. 그런 기발함 (또는 기이함)은 비극적인 것과 코믹함,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즐거움과 불쾌함, 영웅적인 긴장감과 단순한 소음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닌 광기를 일으킨다. 그것은 신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경멸의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제자들에게 이런 무절제함을 금지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자연의 순수한 원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영향에도 불구하고 글룩의 발자취를 좇아,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음악가는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번역이 잘 안되네요..ㅜㅜ)


안셀름 후텐브레너 (Anselm Huttenbrenner)는 살리에리가 항상 모차르트에 대하여 "특별한 존경으로 가지고" 이야기 했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궁정 도서관으로 부터 악보들을 빌려줄 정도로 이 두 작곡가가 친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콘스탄체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사이가 나빴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관계는 건전한 직업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따르면, 살리에리의 질투심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소년이었던 시절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소망에 근거한다. 노년의 살리에리는 고해신부가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자 그 자신을 다시 한번 모차르트와 비교하며 그 경구를 의심하는 장면은 탁월한 장면이다. 그러나 1760년경에 이탈리아의 젊은이에 의하여 주장되어진 "위대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거의 반세기나 앞선 것이며 사실은 거의 전적으로 19세기의 독일의 개념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역사적인 실질에 부합하는 것은 그가 궁정작곡가와 제국의 카펠마이스터로서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가 비엔나 봉봉을 즐겼다는 것 밖에는 없다.

살리에리가 역사적으로 위대하다는 평가를 얻지는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을 위하여 오페라를 작곡하고 의심할 수 없는 음악성을 가지고 있던 매우 존경받는 성공적인 작곡가였다. 대조적으로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음악은 그의 진정한 재능에는 못 미치는 단순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즉흥성과 연주 기술이 예외적으로 뛰어난 것이었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살리에리의 재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살리에리를 최소한의 재능만 있는 음악가로 묘사함으로서 음악적인 재능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 주었고, 그럼으로서 샤퍼의 계획대로 드라마를 진행시켰다. 살리에리의 음악은 불멸성을 획득할 수는 없었을지는 모르나 늘 올바르고, 재능이 있으며, 적절한 것이었다.

주변인물들의 성격

살리에리의 고용주였던 요세프 2세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낮게 평가되어 있다. 샤퍼와 포먼은 황제를 순진하고 잘 교육받지 못한 음악가로 그려내었다. 그가 살리에리의 쉬운 행진곡 소품을 가지고 고생하는 장면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러나, 요세프 2세는 음악적으로 세련된 사람이었고 꽤 수준 높은 연주가였다. 황제는 그의 극장 관리에 참가했었고 거의 매일 저녁 실내악을 위한 시간을 가졌고 가끔은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첼로나 건반악기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는 벤첼 라이문드 비르크 (Wenzel Raimund Birck, 1718-63)의 학생이었고, 1762년에는 요한 아돌프 핫세 (Johann Adolf Hasse)가 황제의 가족들을 위하여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연도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했었다.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요세프의 반응은 "너무 음표가 많다"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의견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의견은 18세기에 전문가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었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이든에게 헌정된 모차르트의 6개의 현악사중주를 "잘못된 음표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불가해하고 연주할 수 없는 곡들로 여겼었다. 몇몇 사람들은 곡에 불만족하여 모차르트의 출판인인 아르타리아 (Artaria)에 악보들을 반품하기도 했었다.

샤퍼가 그린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Hieronymous Colloredo)는 요세프 2세의 정치적, 이념적인 대척점이었다. 아마데우스에서 요세프는 대주교를 화나게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지기스문트 크리스토프 슈라텐바흐 (Sigismund Christoph Schrattenbach)의 사후에 콜로레도를 뽑은 것은 잘츠부르크에서 요세프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두드러진 변화였다. 슈라텐바흐는 자비롭고 콜로레도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주로 모차르트 일가의 서신교환으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의견에 근거하여 대주교나 다른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고용과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데에 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매우 편향된 근거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콜로레도는 재직 시에 계몽주의적인 견해와 행동을 보여주었고, 슈라텐바흐는 모차르트 일가에 대한 자비로움을 보여주었다. 볼크마르 브라운베렌스 (Volkmar Braunbehrens)는 그를 "매우 경건한 척하는 괴벽스럽고, 변덕스러운 고집불통이며 대주교보다는 아이들의 사제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1778년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장인은 1779년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샤퍼와 포먼은 영리하게 돈지오반니와 마술피리로의 등장인물들부터 생존해 있던 다른 부모들 (아버지와 장모)의 성격을 비교하여 촛점을 맞추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어두운 화음이 같이 나오면서 기사장이 되고, 마리아 카실리에 베버는 밤의 여왕이 된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프로이 베버를 매우 까다로운 사람으로 묘사했었는데, 밤의 여왕으로 비유한 것은 하는 것은 성격이 어떠했던가를 잘 나타내어 준다. 그러므로, 비록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영화에서 주변적인 인물로만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데우스에서의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대체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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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그의 작품들이 음악가들에게 받는 존경이나, 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점을 보면, 그는 아마도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일 것이다." 1980년판의 뉴그로브 음악사전은 이와 같은 칭찬과 더불어 베토벤에 대한 글을 위엄있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10여년 후 독일 골리앗 (역주: 베토벤을 지칭)에게 보다는 모차르트라는 다윗에게 들어 맞게 되었다. 이 해 (1991년)가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고전적인 이미지가 베토벤의 더 외향적인 표현보다 선호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라디오 채널을 휴 다운즈나 피터 우스티노프가 모차르트 스페셜을 진행하는 PBS로 돌려보라. 또 채널을 상업방송들 중의 하나로 돌려보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K.466과 "작은" G단조 교향곡 K. 183/173dB가 맥킨토시 컴퓨터를 팔고 있고, 돈지오반니는 Cheer 세탁세제를 선전하고, 피가로의 결혼은 Sirocco 자동차를 팔고 있고, 레퀴엠의 라크리모사는 Lee 청바지를 칭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또 다른 피아노협주곡 (K.482)는 맥스웰하우스 커피광고를 장식하고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에 쓴 교향곡의 발견은 뉴욕타임즈의 일면을 장식한다. 딜러와 수집가들은 작은 기록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모차르트의 서명은 명화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언젠가 딜러들은 "Andretter" 세레나데 K.185를 조각내어 각각 따로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지오반니는 현재 라보엠과 나비부인과 박스오피스에서 티켓판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모차르트의 대중화는 이로 인하여 가장 많이 이익을 얻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며, 무대와 영화로부터 온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1980년대의 모차르트 열풍은 피터 샤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연극과, 이어서 밀로스 포먼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는 다른 어떤 것들이 작곡가 사후 20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모차르트를 위하여 한 셈이다. '아마데우스'는 런던, 워싱턴, 뉴욕에서 상연되었고, 비엔나의 부르크극장 (Burgtheater)과 부다페스트의 넴제티 신하즈 (Nemzeti Szinhaz)에서 상연될 때에는 독일어, 헝가리어로 번역되었다. 샤퍼은 무대 버전을 계속적으로 수정했는데, 그는, "분명함, 구조적인 질서 그리고 드라마에의 거의 강박에 가까운 추구..... 런던 버전에서 잘못된 점의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몰락과 거의 관계가 없게 보였다는 것이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샤퍼와 포먼은 다시 원고를 수정하였는데, 단지 새로운 미디어를 위한 변경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더 순진한 관객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객관적인 "볼프강 모차르트의 삶"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이 점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무대에서의 아마데우스는 작곡가의 전기 다큐멘터리로 의도되지는 않았고 영화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장식하는 월권 - 그 중에서도 특히 청중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주제를 강조할 목적으로 - 을 했다고 본다.

영화는 무대에서 보다 훨씬 더 그러한데,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럴법한 드라마를 역사 속의 시간, 장소, 실존인물들로 바꾸어 인식 시켰다. 무대공연에서 경고할 수 있었던 부분은 셀룰로이드 필름에는 넣을 수가 없었고, 픽션은 진실과 분리되지 않았다.

아마데우스는 궁정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의 작곡가로서의 신적인 재능에 대한 깊은 질투심에 중점을 둔다. 모차르트의 세련되지 못한 태도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그의 인격으로 내려와서 만든 것과 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진실로 "아마데우스"의 축복으로 신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연극과 영화 둘 다 작곡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 즉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의해 해고된 후로부터 사망 시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비엔나에 거주하였고, 궁정 작곡가로서의 일상업무로부터 자유로운 작곡가가 되었으나, 재정적인 안정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 10년동안 모차르트는 많은 곡들을 작곡하였는데, 모두 놀랄만큼 우수한 곡들이었다.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관계에 촛점을 맞추기 위하여 비엔나 궁정의 장면들을 많이 설정한다. 몇몇 상황들이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들은 궁정 생활에 대한,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왜곡이다.

영화가 개봉한지 7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음악학자들은 여전히 볼프강, 콘스탄체 그리고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요세프 2세 황제, 그리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그들은 정말 그러했었는가? 1991년 '모차르트의 해'는 이런 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검토하여 기록 바로 세우기를 시작할 시기이다.

'장식으로의 픽션' (역주: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극에 삽입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말함)은 작가들에 의한 창조와 역사적인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샤퍼와 포만 둘 다 모차르트의 전기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역사적인 논란거리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모차르트의 삶을 변형시킨 것은 다폰테가 보마르셰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꾼 것과 유사했다. 길이는 매체의 형식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도록 만들어졌고, 등장인물의 수는 감소되었으며, 상황은 재정비되고 결합되어졌다.

그러나, (극에서의)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동기는 18세기 삶의 재창조일 수도 있다. 만약 샤퍼와 포먼이 그렇게 했다면, 또 그것을 의도했었다면, 그들의 영화의 힘이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기, 목표 그리고 감정 또는 적어도 모차르트 시대의 사람들이 표현하고 유지했던 방식은 확실히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과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생존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둘 뿐이었는데, 이러한 비율은 그 당시에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만약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1990년대에 볼 수 있는 반응과 같은 크기였다면, 그들은 결혼생활 내내 거의 계속적으로 슬퍼만 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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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Portraits of Anomaly:
Nannerl Mozart, Fanny Mendelssohn, Clara Schumann

Connie Sunday © 2006
(Women's Studies essay on the lives of three eminent women in music)
"여성의 교육은 항상 남성에 상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즐겁게하고, 우리에게 유용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만들어야 하고, 어린시절에 우리를 교육해야 하고, 성장했을 때는 우리를 돌보아야 하며, 충고하고, 위로하고,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것 -- 이것이 전 시대를 통틀어 여성의 의무인 것이고 그들이 유년기에 배워야 할 것들이다" 루소

"100명의 훌륭한 여성 작곡가들 중에서, 합리적이고 좋은 아내, 세심하고 유능한 주부, 그리고 사려깊은 어머니로서의 모든 의무를 동시에 만족시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요한 캠페 (Johann Campe)


우리들의 문화를 점검하고 성 정체성에 대하여 비교 문명적인 비교를 하면, 우리는 이제, 약 10년전까지는 남성의 편견이 거의 모든 질서의 문헌들을 "특징지우고" 있었슴을 알 수 있다. 특정한 극도로 비정상적인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여성은 가족 구성원을 생산해낸다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핵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온실" 그리고 집안의 영역의 존재로 격하되어 왔었다. 남성들은 문화의 지배자들이었고, 남성적인 세계관이 압도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주변의 인물로 보여졌으며, 남성들이 대표하고 있는 체제에는 위협이었다. 권력은 남성의 손에 있었고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는 3명의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 궤도를 통하여 사회적인 편견이라는 쉽지 않은 바다에서 어떻게 항해했었나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여성들은 중세시대부터 작곡을 해왔으나,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언론의 인정과 더 많은 청중과 더불어 여성음악가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남성과 관련이 있었던 영역에서 여성이 가장 많은 참여도를 보여 준것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조류가 가져다 준 결과이며 특히 피아노의 발명의 결과이기도 하다. 솔로와 실내악 작품 (특히, 가곡 또는 노래)의 분위기는 여성들이 연주자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집안이라는 공간과 편안하게잘 맞았다. 이는 큰 규모의 작품이 연주되던 공공장소의 경우와 대조적인데, 그 곳에서 오페라, 종교음악, 관현악 음악들은 점잖은 여성들에게는 금지되어졌었다. 19세기의 여성의 창조적인 성취 - 주로 가곡에서 - 는 남성 작곡가들과 비교하여도 우수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몇몇의 작품들은 이 시기 최고의 작곡가들에 필적할 만하다.

여성들은 직업적으로 자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여성도 바흐가 했던 역할을,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작품을 작곡해야 하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 바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학에서는 전통적인 주류에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학의 본성이 문헌들 (여성들의 음악에 대한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나, 가장 진보적이고 음악 유형의 변화를 이끌어갔던 예술가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그 곳에서 (금세기까지) 여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편견은 1750년 -1900년까지 여성음악천재가 결핍되어 있었던 이유의 중심적인 요소이다. 18세기에는, 여성들은 배울 수 있는 지적, 감정적인 역량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여성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여성으로서의 진실한 직업인 아내와 엄마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믿어졌었다.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 시대에 계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어졌지만, 그의 약혼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적당히 배우는 것은 숙녀를 만들지만, 학자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독서를 하는 소녀는 웃음거리가 되어 마땅하지요."

여성들은 에스코트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회를 여는 것은 어린 소녀의 품행이나, 성격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어졌다. 이는 소녀들이,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필수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파니 멘델스존은 19세기초에 가장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재능이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32세가 될 때까지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작곡은 출판되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여성들은 그들의 작곡을 과소평가하였고, 계속하기 위하여는 과도할 만큼 칭찬을 받아야만 했다.

여성들의 활동범위와 성취가 집안일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업적인 교육은 부족했다. 여성이 교육을 받을 때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부정적인 사회의 태도 사이에 날카로운 불일치가 있었다. 여성의 일은 전문가의 눈에는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것을 뜻했고, 딜레땅띠즘의 분위기가 여성들의 작품에 대한 토론에는 항상 함께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나 집안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순화시켜야만 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매력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양보해야만 했던 것이 전체 여성들에게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스스로를 부양하려는 필요는 여성의 일에 대한 권리와 직업을 가질 권리의 문제를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변화되었다.
 
19세기 중에는 충분히 교육받은 소녀들이 여성스러운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희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의 새로운 운동 중의 하나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여성 음악학도들은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거나 또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수녀가 되곤 했다.) 여성들은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거장음악기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여성들은, 주로 가수들인데, 하층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Nannerl Mozart모차르트에 대한 기록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능력있는 누이인, 난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난넬은 어린 천재 남동생과 그들의 부모와 같이 3번의 유럽 순회연주에 동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기록에서는 항상 재능있는 누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소녀 난넬의 재능은 보통은 기록되어져 있다. 그녀가 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했던, 런던과 파리를 포함했던 3번째 서유럽 여행에서 (1766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리드리히 마이콰이어 그림(Friedrich Meichoir Grimm) 남작은 그녀가 피아노를 뛰어나게 연주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작품들을 놀랍게 정확하게 연주한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남동생에 결코 못지 않은 초기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로브 음악사전의 다음의 비극적 문장은 사람들의 감적을 자극한다: "1769년부터, 난넬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오로지 집에서만 보여주도록 허락받았다." 그녀는 18세였다. 그녀의 남동생이 작곡가와 연주의 거장으로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33세였을때 그녀는 성 길간 (St. Gilgan)의 판사와 결혼했다. 세 아이를 낳고, 남편이 사망한 후에, 그녀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선생으로서 단순하고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 사람들은 위대한 모차르트의 누이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했다. 1839년, 그녀가 사망하던 해에 그녀는 가난과 외로움으로 눈이 멀고, 기운이 없었고, 지쳤으며, 약해져서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작곡에 손을 대었고 그 작품들은 남동생이 인정할 만한 것들이었으나, 그녀의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역 그녀가 진실로 그녀의 유명한 남동생만큼 능력이 있었다면 난넬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 아마 모든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음악천재가 되었을까? 남매는 각자 결혼을 할 때까지 가깝게 지냈고 그녀의 일기와 편지는 모차르트 가족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문헌들인데, (이러한 난넬의 삶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니 멘델스존은 이러한 Fanny Mendelssohn궤도에서 좀 더 발전된 예인데, 그의 남동생에 필적할 만한 음악적 재능을 일찌기 보여 주었고, 동생처럼 베르거(Berger)와 젤터(Zelter)에게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는데, 그 때 그녀는 남동생과 동등한 수준이었다고 알려진다. 옥스포드 사전은 그녀를 두 번 모욕했는데, 한 번은 그녀가 "거의 그녀의 남동생만큼이나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언급했었고, 또 그녀를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라고 칭했었다.

파니 멘델스존은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는데 반대하는 그녀의 아버지의 완고한 훈계와 그녀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집안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작곡을 계속했다. 펠릭스는 그녀를 작곡가로서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으나,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으나, 전반적으로 지지하지 않게 되면서 더이상 자랑스러워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진지한 작품의 출판만을 고려해요... 그리고 인생 전부를 작가로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파니는.... 작가를 하고 싶어하지고 않고, 천직으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런 면에서 너무나 여성적인데, 그것은 적절한 것이지요. 그녀는 가정을 돌보고 있으며, 우선적인 주부로서의 일을 하고 나서가 아니면 대중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음악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출판을 한다는 것은 그녀가 이러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고, 저는 이런 점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만약 그녀가 스스로 출판하기로 결정하거나, 또는 헨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말했듯이, 저는 가능한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것을 하도록 그녀를 격려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파니는 포괄적인 교육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었으나, 그리고 나서는 교육받은 것을 실행하고 바로 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인당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에게 음악은 장식일 뿐이고 그래야만 한다. 너는 진정한 너의 천직 - 젊은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천직 -을 위하여 성실히 열심히 준비해야만 한단다.  그것은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란다." 펠릭스의 승인과 지지로 그녀는 작곡한 200곡이 훨씬 넘는 의 리트를 출판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반복적으로 그녀가 직업적인 작곡가가 되는 것이나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을 반대했다. 여성 리트 작곡가들 대부분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1775년에서 1850년까지 이루어 낸 업적은 훌륭하고 존경받을만 하며 진지한 학구적인 연구, 출판 그리고 연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녀가 24세에 화가인 헨젤과 결혼했을 때, 펠릭스는 이미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길을 전도양양하게 시작한 후 였다. 그녀는 남동생의 성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지만 그녀의 삶은 "집에서의" 음악에 바쳐져야만 했다. 일요일에 베를린에서 가족들과 음악회를 하는 것이 고립되어 음악을 하던 그녀에게 단 하나의 출구였고, 그녀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작곡하고 지휘할 수 있었다. 빌헬름 헨젤은 그녀를 격려하였으나, 펠릭스는 작품이 출판되어 알려지기를 바라는 누이의 희망과, 제한적으로 대중들을 접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과 자존심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창작품에 대하여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거나 아주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작품들에 대한 모든 기쁨 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의 가치를 판단할 힘까지도 잃게 된다."
파니의 초기 작품들 중 3곡은 펠릭스의 Op.8과 9에 포함되어서 출판되어졌는데, 그녀가 작곡한 이중창은 그 모음곡 중에서 최고의 것이었다("An des lust-gen Brunnes Rand"). 이 초기 작품들은 남동생의 작품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개성적인 특징과 표현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녀는 하나의 서곡과 5개의 오케스트라 부분을 포함하는 성악곡도 작곡하였다. 그녀의 작품 대다수는, 대규모의 칸타타들과 오라토리오를 포함하여,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은 감상적인 살롱음악과 요점없는 기교만 있는 음악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 이런 노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명이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다.

Clara Schumann클라라 비이크 슈만은 그 세기에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 그녀에게 일어났었을 지도 모르는 일들은 먼저 일어났던 위의 두 이야기들로 이미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클라라 슈만이 그들과 가지는 공통점은 위대한 예술가와의 관계 또는 교육이다. 모차르트가의 아이들에게는 레오폴드가 있었고, 파니는 주변의 환경이 모두 훌륭했었으며, 클라라에게는 교육자로서의 재능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비록 그녀의 남편 로베르트에 뮤즈의 역할을 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클라라 슈만은, 당시 유럽 사회가 일반적으로 여성의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두드러지는 성공을 얻었고, 그 시대의 음악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 세기의 천재적으로 위대한 음악가와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녀는 개인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그녀가 집을 떠나 모험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심한 과소평가이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하였을 때,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그녀는 더 많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녀는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그녀가 9살 때 시작했었던 전문 연주가로서의 삶을 택했다.

그녀는 앞에 악보를 두지 않고 리사이틀을 했고, 보조해주는 음악가들 없이 연주를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즉, 현대의 연주처럼) 그녀의 선곡과 수준은 솔로 피아노 리사이틀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파가니니, 리스트, 탈베르그 그리고 루빈스타인의 동료였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 그리고 그녀의 남편의 작품과 그녀를 사모했던 젊은 브람스의 작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홍보자였다. 그녀는 세련된 연주를 통하여 당시에 거슬리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베토벤의 음악을 대중화시켰다. 그녀의 연주회들은 매진되었었고, 그녀는 어디에서나 열렬한 환호, 따뜻한 리뷰, 선물들 그리고 존경 속에서 맞아들여졌다. 여전히 그녀는 작곡가로서의 역할을 우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미 로베르트가 나에게 적어준 Ruchert의 시로 (곡을 쓰려고) 몇 번 시도를 했다. 그러나 잘 되질 않았다 - 나는 작곡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그녀의 국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전기들에서 그녀는 자주 종속적인 - 또는 수치스러운 -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본격적인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사항들은 얼버무려져 있고 생략되어 있으며 서신들은 요약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연주자도, 남자건 여자건 간에 그 만한 시간동안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유지해 온 사람은 없었는데, 그녀는 영국과 유럽에서 1,300회가 넘는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그녀의 동시대 여성들 대다수는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반짝이는 데뷔와 빛나는 외모로 시작하곤 하지만, 결혼할 무렵 또는 압력이 너무 강해진다고 생각될 즈음에는 연주생활을 포기하곤 하였다. 클라라는 그녀 자신의 연주들을 관리하는 일도 떠맡았었다. 피아노들을 빌리고, 이동시키고 조율하게 했으며 홀, 조명, 난방들을 준비시켰고, 티켓을 인쇄하고 신문과 포스터에 광고를 실었으며 스스로의 의상을 준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했고,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교육의 덕으로 돌렸다. 1816년에, 그는 잘 알려져 있고 성공한 플루티스트의 손녀인 마리안느와 결혼했다. 그는 클라라의 어머니가 딸의 재능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으나, 그녀는 비범한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 비이크 부부가 이혼했을 때, 클라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에만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라는 색슨 법률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공적으로 그녀를 신동으로 훈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작품, 물리적인 훈련, 연주회 관람 그리고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만남이라는 그의 교육프로그램은 클라라의 여동생에게도 역시 사용되어졌다), 그는 그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심하게 대응했다. 그녀와 로베르트 슈만은 이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가야했다. 그들이 승소하여 결혼을 허락받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수입으로 된 저금을 모두 앗아가고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해야하는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 다 그녀가 그 주변의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녀의 일기에서: "나의 역할은 로베르트가 작곡을 하고 있을때 항상 그렇듯이 밀려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하루에 한 시간도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 자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7명의 아이들과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던 남편 때문에, 그녀는 35세에 그녀의 연주활동을 재개했다. (로버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 냈소. 당신은 동료를 데리고 갔고, 나는 아이들과 나의 작업으로 돌아갔소.") 그녀는 그녀 자신을 먼저 예술가로 여겼고, 부모의 역할은 두번째였다. 여행 중에, 아이들은 가족의 친구들, 조부모들 또는 기숙학교에 맡겨졌다. 그녀는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다. 맏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 그는 가족들의 만남(종종 여름내내)이나, 연주 여행을 주선하고, 교습약속을 잡는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14년간의 결혼생활동안, 그리고 8명의 아이들 (하나는 아주 어려서 죽었고, 유산이 한 번 있었다)을 낳는 동안, 서로가 화내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사회적인 편견이 이들 세 명의 천재 여성들에게 가하여 져서 그들을 예외적인 위치에 놓이게 했던 각각의 상황의 종류를 이 간략한 전기글이 설명해 주었기를 바란다. 그들의 노력에는 희망적인 것이 있다. 이 삼부작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이었다. 확실히 미래의 여성들은 이러한 추세를 계속해 나갈 것이고, 여성들이 사회에서 예술가로서 덜 예외적인 존재로, 더 많이 받아 들여지게 됨에 따라, 더 평등한 교육적이고 음악적인 기회의 배분으로 부터 혜택을 받을 것이다.  

주석 및 전기, 대표작품은 다음의 링크 참고:
원문 출처
또다른 출처 - pdf 다운로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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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찾아 보고 번역하려는 생각은 파니 멘델스존에 대한 DVD - Requiem for Fanny - 를 보고 나서 들었다. 20세기.. 아니 거의 20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여성 음악가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연주가들은 종종 있었으나, 여성 작곡가는 정말 찾아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 중에서 알려진 세 명의 인물이 바로 위의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고, 나는 이 들 세명, 그리고 더 나아가 알려지지 않은 이전 시대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해 알아 보고 싶어 졌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윗 글은 정말 "개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더 많은 연구들이 존재하고 진행 중인 것 같다. 클라라나 파니의 경우에는 곡이 남아 있어서 그녀들의 작품이 어떠했는지 알아 볼 수도 있다. (난넬의 경우에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만 가도 위의 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정보들이 있다... 나중에 한 명씩 집중탐구를 해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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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슈삐.
세종문화회관에서 모차르트전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가 몇 달 전이다. 아이들 데리고 가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쭉 해왔는데, 벌써 여름방학이 끝나버렸고, 전시회도 며칠 남지 않았다. 주말마다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너무 피곤하거나...

토요일에 가야지 했으나 또 무산... 일요일에 일찍 일어나, 그 동네에서 하는 전시회를 두개 혹은 세개 보고 와야지 했으나... 이래 저래 나갈 준비를 하려고 보니 어느새 오후 4시...;;

결국 5시가 다되어서야 출발을 했다.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주차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자주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도록 해주고 싶은데, 별로 기회가 없다. 오늘 같은 날은 지하철 경험도 늘리고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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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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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해서 표를 끊고 들어가자 마자 있는 커다란 모차르트의 초상화 앞에서 한 컷.

전시실에 들어가면서 부터는 사진촬영이 안되는 것으로 알아서 열심히 구경을 했다. 기다란 모차르트의 이름을 그의 세례명부에서 따라 읽고,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읽어보면서 전시관람을 시작. 

그 시절의 다양한 물건들, 모차르트가 쓰던 악기들, 모차르트의 악보들, 그리고 그의 곡을 들을 수 있는 공간, 모차르트의 자동작곡기로 뽑아낸 피아노 곡들. 생각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들이 많았고, 아이들도 "또 음악관련된 거야"라는 처음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진심으로 재미있어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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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가장 즐거워 했던 모차르트 시절의 옷입기. 둘이 가발까지 쓰고 있는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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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쓰던 바이올린. 거트현에 라이온 헤드.. 살짝 작아 보이는 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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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피아노라고 전시되어 있는 악기. 피아노라기 보다는 스피넷, 클라비코드. 비슷한 악기가 두 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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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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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뒤뜰의 조형작품들.

아이들에겐 모차르트에 대해 조금 더 배우는 시간이 되었는데.. 나에겐 그의 작품의 심오함과 처절한 상황에서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곡들을 썼던 모차르트의 경이로운 천재성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osted by 슈삐.
Improvising Mozart by Robert Levin

클래식 음악가들은 매우 전문화되어져 버렸다. 오늘날 연주자들의 대부분은 하루에 수시간씩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진 텍스트를 배우고 완벽하게 익히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연습한다. 음악을 재생산하는 데에 매우 재능이 있으나, 그들은 종종 음악을 창조해내는 훈련은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다. 출구를 못 찾거나 대사를 잊어버린 상황에 직면한 배우는 그 갭을 메울 대사를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내면서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기억력의 실수, 갑작스런 발음이나 사투리의 대조는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내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상황이며, 그것이 흉내내는 인생보다 순간적으로는 더 강렬해 보이는 연극의 연금술이 아니라는 것을 뼈져리게 알려준다. 운율이 있는 고전시가에서 애드립의 대사를 읊는 것이 어렵지만, 모든 배우들에게 그의 모국어로 즉흥적으로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상화된 경험이다. 이것은 음악가들에게는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위대한 작곡가의 개인적인 언어들 안에서 그런 발명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작곡, 문법, 문장론, 수사학 그리고 음악 (이론)의 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연주가들에게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겁나는 일이다.

건반 앞에 앉은 어린 모차르트

18세기에는 모든 작곡가들은 연주자들이었고 사실상 모든 연주자들은 작곡을 했다. 더구나, 실제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은 새로운 것이었다. 오늘날의 대중음악과 예술음악과의 분리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각은 시대의 특징에 맞는 자연스러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흥연주는 비예술 음악에서는 필수적이다. 모든 문화권의 음악에서 존재하고, 재즈에서는 중심적인 과제이다. 루이 암스트롱, 콜맨 호킨스, 아트 테이텀,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과거의 대가들의 임의적인 샘플링임)의 천재성은 환상적인 상상의 자유로은 비행을 담은 음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연주들은 즉흥연주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이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재능에 대해 평가를 했던 순서이다)로서의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소위 카덴차와 도입부 (전주)라고 불리우는 - 그가 충동적으로 대담한 연주를 하기 위하여 설정한 - 인위적인 공백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많은 패시지들을 스케치나 개략적인 형태로 남겨두었는데, 실연에서 연주자들이 각각의 연주에서 새로운 특정한 표현적인 내용을 가지고 채우도록 연주자들의 의지에 맡겨 놓은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1악장의 자필 악보. 이 페이지 마지막의 코드는 모차르트가 즉흥연주를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공백 (contrived chasms)' 중의 하나이다. 

20세기에 음악가들은 충실하게 작곡자들이 써놓은 성서 (악보)를 지켜서 연주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만약 연주자의 의지가 나타나면, 작곡된 곡을 단순히 자기 자신을 과장하여 드러내려는 도구로만 사용하기 위하여 곡의 지시들을 무시하고 눈길을 끌게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고전음악의 연주자와 청중 각각은 작곡가들이 이 들 작품을 썼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많이 표준화된 레퍼토리를 경험해왔고, 작품이 최초에 연주되었을 때의 효과의 참신함을 그들에게 다시 느끼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졌다. 오늘날 표준화된 많은 연주들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에서 즉흥연주는 전체적인 작품의 성격을 내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한데, 쓰여져 있는 텍스트를 충동적으로 꾸며서 연주하는 것은 음악적인 표면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꾸밈음과 즉흥적인 부분들은 작품의 개성을 묘사하는 것을 좀 더 강조하여야 하며, 단지 평범하고 진부한 관습 (여기서는 트릴, 저기서는 curlicue)을 연속으로 넣어 놓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와 그의 동료들로로부터 그 음악의 장식된 버전이 분명하게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장식의 종류와 양을 보여주고 있는 상당수의 예를 가지고 있다. 이런 증거로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연주 중 많은 수가 받아 들일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다고 모차르트가 생각할 지도 모를 만한 방식으로 연주되는 패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연주가 기대하는 바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오히려 '.....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다'가 된다면, 그 연주가 얼마나 시적이고, 얼마나 음율적으로 매혹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의 자필 악보에서 느린 악장의 시작 부분. 피아노 부분의 오른 손 부분만이 쓰여져 있다 — 모차르트는 장식부분 뿐만아니라 왼손도 즉흥연주 하였을 것이다.

오르가니스트는 제외하고, 고전 음악 연주자들은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거의 다 더이상 즉흥연주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경쟁과 레코딩의 가혹한 상황 하에서, 일관성과 정확성에 어떠한 위협을 가하게 되는 위험을 회피하는 법을 일찌기 배우게 된다.  즉흥연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으나,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 더 음악의 드라마틱하고 감정적인 메시지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즉흥연주도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이 어떤 곡의 언어에 특징을 나타내어 주는 지는 분명히 중요하다. 영화 제작자가 역사적으로 정확한 위치에서 그 시대의 소품들과 복장을 입고 그 시대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수백만 번을 찍었으나, 모든 장면에서 그 장소와는 맞지 않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이의 희곡이 시골 알라바마의 사투리와 억양이 갑작스럽게 삽입되면서 공연되면 청중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코믹하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언어적인 부조화를 음악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인정을 하곤 한다. 만약 모차르트의 언어가 말로우이의 것 만큼이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각각의 연주의 부분으로서 그것을 새롭게 고안해 내기 위하여, 그 곡의 내부로부터 배우는데에 시간을 쓰는 것은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모든 모차르트 연주의 목적이며, 특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와 같이 하는 이 협주곡 사이클의 레코딩에서의 목적이기도 하다.

출처: http://www.aam.co.uk/features/97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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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니까, 가능하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공연들을 좀 보러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띈 것은 예당에서 매년하는 가족오페라 마술피리. 도윤이도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는 가족공연. 일단 4자리를 예매했다.

8월4일 토요일 5시30분 공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은 가본 적이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는 간혹 가봤고, 콘서트홀이야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토월극장은 어느정도의 규모인지 몰랐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가족오페라라는 이 공연에 딱 알맞은 적당한 크기의 홀이 었다. 가보고 나니, 너무 심하게 앞자리로 예매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을 맨 앞에 나란히 앉히고, 우리는 두번째 줄에 앉았다.

정식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라기 보다는, 아이들을 위하여, 훨씬 재미있게 꾸미고, 복장도 아이들이 즐겁도록 밝은 옷을 입은.. 수정된 마술피리였는데, 공연을 보면서, 사실 모차르트 시대의 마술피리 공연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징슈펠로서,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밝은 내용의 마술피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면 즐기게 하려는 것이 원래 모차르트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이러저러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쓰는 것은 이 공연에는 정말 걸맞지 않은 리뷰가 될 것이지만, 딱 하나는 세명의 소년의 역할을 실제로 보이소프라노가 했었으면 정말 좋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지혜의 세계로의 인도자 역할을 맡고 있는 세 명의 소년은 세명의 '아가씨들'이 맡아 노래를 했는데, 확실한 느낌이 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밤의 여왕의 아리아도 조금 아쉬웠지만.. 통과..

지윤이 도윤이는 이 공연을 보고 와서 자기들끼리 오페라를 흉내내며 놀았다. 공연이 재미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특히 파파게노와 파파게나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파파게나가 할머니 복장을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추던 춤을 흉내낸다.

나는 집에 돌아와 마술피리 DVD를 걸고 다시 한번 보았다. 좀 잔인한 비교감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공연에서의 즐거운 느낌에, 내가 생각하던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음악(!)을 더해 보고 싶었다. 그냥 DVD만 볼 때 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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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서.. 아델라이데 협주곡의 진위도 역시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있다고 하네요..


http://www.mozartforum.com/Lore/article.php?id=040&pt_sid=71f5cde08ba54f47d8f623fed00769ba


KV.Anh294a Adelaide Violin Concerto


Dennis Pajot

(이사람..위 주소의 모차르트포럼 사이트 운영자군요...^^)


아델라이데 협주곡은 1933년 Marius Casadesus에 의해 편집, 출판되어졌다. Jelly d'Aranyi가 런던에서 초연했다. (이 부분은... 좀 이상하군요. 메뉴인 연주가 1932년 녹음이라고 되어 있던뎅.....ㅡㅡ;;; 뭐가 맞는 건지 몰겠네요...) Casadesus에 의해 아델라이데로 명명되었는데, 그가 작업한 짧은 악보는 두 개의 보표 위에 서명이 있었고 - 위의 것은 독주부분 (D)에, 아래것은 베이스 (E)에 - 루이15세의 큰딸인 Adelaide de France부인에게 헌정되어졌다고 쓰여 있었으며 1766년 5월 26일, 베르사이유라고 되어 있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소위 서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개인 소장품이라고 주장되어졌지만, 그 당시의 전문가들 (당시 뛰어난 모차르트 전문가인 Georges St.Foix를 포함하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또 다른 뛰어난 전문가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친척이긴 하나 다른 사람입니다^^;; 유명한 음악학자죠)는 그 서명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출판사인 Schott도 서명을 봤다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1934년 처음으로 이 작품의 근원을 분석했다. 그는 왜 이 협주곡이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1768년 작성한 그의 아들의 작품목록에 빠져있는지를 의문시했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모차르트 일가가 1766년5월28일에 베르사이유에 도착하였고 (작품이 헌정되었다고 주장되는 날보다 2일 뒤이다) 6월1일에 파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왜 모차르트가 미완성된 작품을 헌정했는지도 질문했다. 그는 만약 볼프강이 "협주곡을 쓰길 원했다면, 그는 협주곡으로 썼을 것이지, 두 오선지로 쓰지 않았을 것이고, 모차르트는 총보를 다루는 일에 아주 익숙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작품의 스타일이 모차르트 후기 작품으로 부터 나온 것 같다고 믿었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은 이 작품이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는 점을 의심했다. 그러나, 혹시 네델란드에서 스케치된 "변주곡"의 잃어버린 부분이며 나중에 파리로 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함으로서 약간의 가능성은 남겨놓았다.


10년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모차르트 책에서, 이 협주곡은 Casadesus의 크라이슬러 식의 신비화된 곡이라고 부드럽게 서술했다. (크라이슬러가 본인의 곡인데도 마치 예전 작곡가의 곡인 것처럼 하곤 했다는 군요. 그래서 Casadesus도 본인의 곡을 모차르트의 곡인 것 처럼 신비화 시켰을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네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고클에 물어봤더니 어느 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Friedrich Blume은 1956년에 이 헌정에 관한 문제의 해결점에 도달했다. 원고와 헌정사는 서로 전혀 관계가 없으면 우연히 같이 있게 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면 그 작품과 서명 모두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가설을 세우는 것이 훨씬 낫다"라는 것.. 그리하여, Blume은, 1764년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1과 2에 있는 것과 비슷한 그 헌정사가.. 볼프강의 알려지지 않고 실종되었던 또 다른 작품에 대한 헌정사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도록 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그 질문은 이제 별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다"라도 말했다. !!!! Blume은 아델라이데 협주곡이 K207,  K211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고 보았고, 이 두 곡이 아델라이데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는1775년 4월과 7월 사이에 스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믿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세계에서 이 곡을 밀고 있는 단 한 사람은 에후디 메뉴힌이었다. 그는 이 곡을 7번 협주곡과 같이 녹음했다. K6 (나중에 6번째로 다시 매겨진 쾨헬 번호)체계에서는 이 곡을 Anh C (Anhang, 쾨헬 목록의  appendix인데, 의심스럽운 작품들을 그 쪽으로 넣더군요) 섹션에 넣고 있으며, New Grove (음악백과사전)는 이 곡을 단순히 위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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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제가 번역하니 뭔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ㅜㅜ

Posted by 슈삐.